세번째 날은 일정이 빡빡했다. 그래서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바로 아침 식사를 먹었다. 그리고 버스에 타서 피에르로티 전망대(Pierre Loti Hill)로 갔다. 피에르로티 전망대는 이스탄불의 경관을 한눈에 볼 수 있는 곳 중 하나이다. 피에르로티라는 작가가 이 언덕에서 작업을 했다고 해서 피에르로티 언덕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 언덕에 있는 전망대가 피에르로티 전망대이다.

버스에서 내려서 가이드를 따라갔다. 주차장에서 조금 걸어가니 케이블카 타는 건물이 보인다. 사진을 잘 찍었어야 하는데 가이드 따라가면서 찍다 보니 건물 간판이 안 나오게 찍고 말았다.

피에르로티 전망대 케이블카 타는 건물
피에르로티 전망대 케이블카 타는 건물


건물에 들어가면 케이블카 입구를 안내하는 표지판이 보인다.

 

피에르로티 전망대 케이블카 타는 건물 내 안내 표지판
피에르로티 전망대 케이블카 타는 건물 내 안내 표지판


사람들이 줄을 서고 있고 왔다 갔다 하는 케이블카가 보였다.

 

피에르로티 케이블카
피에르로티 케이블카


터키 가이드가 게이트에서 요금을 내주어서 편하게 승강장으로 들어올 수 있었다. 승강장에 들어오면 피에르로티 언덕 위로 올라가고 내려오는 케이블카를 볼 수 있다.

 

피에르로티 언덕을 오르고 내리는 케이블카
피에르로티 언덕을 오르고 내리는 케이블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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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로티 케이블카 승강장과 통제실
피에르로티 케이블카 승강장과 통제실
내가 탈 케이블카
내가 탈 케이블카


조금 기다리고 있으니 내가 탈 케이블카가 도착하였다. 케이블카에 타서 언덕 위로 올라갔다. 출발하고 대략 2분 40초 정도가 지나니 도착했다. 케이블카의 문이 열리고 내렸다.

 

피에르로티 언덕에 도착한 케이블카
피에르로티 언덕에 도착한 케이블카


피에르로티 전망대에 대한 후기를 보면 사람이 너무 많았다는 것들도 많았다. 그런데 우리는 아침에 빨리 출발한 덕분인지 다행히 사람이 많지 않았다. 쌀쌀한 아침 공기에 걸맞게 차분한 분위기에서 이스탄불의 풍경을 바라볼 수 있었다.

 

피에르로티 언덕에 올라서 본 이스탄불의 풍경은 정말 예뼜다. 하늘과 땅, 도시와 자연이 잘 어우러진 풍경이었다.

 

피에르로티 전망대 풍경 1
피에르로티 전망대 풍경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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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르로티 전망대 풍경 2
피에르로티 전망대 풍경 2


여러 사진을 찍었지만 위 사진이 가장 예쁘게 나왔다. 자연과 도시가 잘 어우러져 있어서 보기 좋았다.

 

피에르로티 전망대 풍경 3
피에르로티 전망대 풍경 3
피에르로티 전망대 풍경 4
피에르로티 전망대 풍경 4

 

전망을 보다가 화장실이 가고 싶어져서 화장실에 갔다. 전망대에서 좀 걸으면 풍경 좋은 카페가 나오고 그 위로 상점가가 나온다. 그 상점가 옆에 화장실이 있다. 터키에서는 화장실을 'WC'라고 쓴다.

 

피에르로티 언덕의 화장실
피에르로티 언덕의 화장실


화장실도 다녀오고 다음 집합 시간까지 시간도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이 전망 좋은 카페에서 차 한잔 마시기로 했다.

 

피에르로티 언덕 위의 카페 1
피에르로티 언덕 위의 카페 1
피에르로티 언덕 위의 카페
피에르로티 언덕 위의 카페

 

 

 

피에르로티 언덕 위의 카페에서 본 풍경
피에르로티 언덕 위의 카페에서 본 풍경


자리에 앉아서 웨이터가 오기를 기다렸다. 사실 커피를 마시려고 했다. 나에게 온 웨이터에게 영어로 커피를 달라고 했다. 그런데 웨이터가 '챠이?'라고 되물었다. 터키에서는 커피를 '차이'라고 부르나 하고 생각하면서 그렇다고 했다. 잠시 후 웨이터는 홍차를 가지고 왔다. 내 예상과는 약간 다른 전개였지만 홍차도 좋아했기 때문에 기분 좋게 마셨다. 가격은 10리라였다.

 

피에르로티 언덕에서 마신 홍차
피에르로티 언덕에서 마신 홍차


초록색 봉투에 든 것은 설탕이다. 그런데 설탕 모습이 조금 독특했다. 가루 설탕인데 우리나라에서 보는 가루설탕보다 알맹이가 굵었다. 홍차를 마시면서 이스탄불의 풍경을 감상하였다. 이 주변에서 살면 매일 이곳에 올라와서 홍차를 마시며 이 좋은 풍경을 볼 수 있겠구나 하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이스탄불에 사는 사람들이 부러웠다.

그런데 여기 사는 사람들도 서울에 오면 비슷하게 생각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서울에도 맛있는 차를 마시면서 좋은 풍경을 볼 수 있는 곳이 많다. 먼 데 무당이 영하다고 항상 사람은 가까이 있는 좋은 것은 잘 못 보고 멀리 있는 좋은 것만 잘 보이는 존재인 것 같다.

 

아무튼 홍차를 마시면서 풍경을 바라보다 보니 어느덧 집합 시간이 가까워졌다. 다시 전망대 쪽으로 갔다.

피에르로티 언덕에서 본 개들
피에르로티 언덕에서 본 개들


터키에는 곳곳에 들개들이 있다. 그런데 이 개들이 잘 짖지도 않고 물려고 하지도 않는다. 얌전하다. 피에르로티 언덕에도 개들이 있었다.

 

피에르로티 언덕에서 본 케이블카
피에르로티 언덕에서 본 케이블카


사람들이 다 모이자 가이드가 다시 케이블카로 안내했다.

 

내려가는 케이블카를 기다리는 모습
내려가는 케이블카를 기다리는 모습
내가 탈 피에르로티 케이블카
내가 탈 피에르로티 케이블카


이번에는 보스포루스 해협이 보이는 자리에 앉았다. 내려가면서 보는 풍경도 좋았다. 케이블카가 다시 땅으로 도착하였다. 가이드를 따라서 주차장으로 나갔다. 다른 일행들이 아직 케이블카를 타고 내려오고 있었기 때문에 여유가 있었다. 주차장에서 다른 관광객을 구경하다가 일행에 맞추어 버스에 탑승했다.

 

피에르로티 케이블카 주차장
피에르로티 케이블카 주차장


아름다운 풍경을 볼 수 있는 피에르로티 언덕을 뒤로하고, 버스를 타고 그랜드바자르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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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버스를 타고 파노라마 1453으로 출발하였다. 가면서 버스 창문 밖으로 테오도시우스의 삼중 성벽이 보였다. 멀리서 보는 데에도 상당히 견고해 보였다. 군데군데 없어지거나 훼손된 곳들도 있었지만 상상의 날개를 펼쳐서 과거의 모습을 보기 위하여 노력하였다. 성벽에 직접 가서 그 위용을 더 자세히 느껴보고 싶었다. 만약 자유여행이라면 그렇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패키지 투어이니 정해진 일정을 따르기로 하였다.

차창에서 바라본 테오도시우스의 삼중 성벽 1 차창에서 바라본 테오도시우스의 삼중 성벽 1
차창에서 바라본 테오도시우스의 삼중 성벽

 

버스가 파노라마 1453 주차장에 도착하였다. 가이드를 따라서 파노라마 1453 박물관으로 이동하였다. 박물관 앞에 공원이 있었다. 공원을 거쳐서 박물관으로 들어갔다.

박물관의 전시장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타고 내려갔다. 테오도시우스 3중 성벽과 콘스탄티노폴리스 공성전에 대하여 설명하는 전시들이 나열되어 있었다. 하지만 터키어로 쓰여있었고, 가이드를 따라가야 했기에 제대로 보기는 어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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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이드가 콘스탄티노플 공성전 당시의 지도 앞에 서서 설명하기 시작하였다. 8만에서 20만으로 추정되는 오스만 제국의 군대를 이끄는 마흐메트 2세가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기 위하여 왔다. 콘스탄티노플을 수비하는 로마제국 군대의 병사는 7천 정도밖에 없었다. 하지만 로마제국에게는 그 유명한 테오도시우스 3중 성벽이 있었다. 비록 많은 병력 차이가 있었지만 3중 성벽 덕분에 로마제국은 오랫동안 버틸 수 있었다. 그렇지만 수비대의 실수로 출입문이 열린 채로 방치되는 사고가 일어나고 오스만 군대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결국에 콘스탄티노플은 오스만 제국이 점령하게 된다.

가이드의 설명이 끝나고 파노라마를 보기 위하여 이동하였다.

 

계단을 따라서 올라가니 파노라마가 나왔다. 군악대의 음악소리도 들렸다. 가이드의 설명에 따르면 오스만 제국은 세계 최초로 군악대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런데 파노라마 1453에서 나오는 음악소리가 실제로 콘스탄티노플 공성전 당시의 음악인지는 잘 모르겠다.

파노라마에는 그 당시 전투가 생생히 묘사되어 있다. 파노라마에서 여러 사진과 동영상을 찍었다.

 

이스탄불 파노라마 1453 사진 이스탄불 파노라마 1453 사진 2
이스탄불 파노라마 1453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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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탄불 파노라마 1453 사진 3이스탄불 파노라마 1453 사진 4
이스탄불 파노라마 1453 사진


위의 사진과 같이 마흐메트 2세의 모습도 보인다.

 

이스탄불 파노라마 1453 사진 5이스탄불 파노라마 1453 사진 6
이스탄불 파노라마 1453 사진

 

이스탄불 파노라마 1453 사진 7
이스탄불 파노라마 1453의 천장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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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노라마를 관광하고 나서 박물관을 나왔다. 나와서 보니 박물관 외벽에도 다양한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이스탄불 파노라마 1453 박물관 벽면
이스탄불 파노라마 1453 박물관 벽면
이스탄불 파노라마 1453 박물관 건물
이스탄불 파노라마 1453 박물관 건물


박물관 앞의 공원도 잘 정비되어 있었다.

 

이스탄불 파노라마 1453 박물관 앞 공원이스탄불 파노라마 1453 박물관 앞 공원 2
이스탄불 파노라마 1453 박물관 앞 공원


다시 버스로 돌아왔다. 모두가 모인 것이 확인되자 우리는 저녁을 먹으러 갔다. 저녁을 먹은 후에 탁심 광장을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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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근이 맛있었던 베이파자르 마을을 떠나 이스탄불로 향했다. 점심으로 케밥을 먹고 돌마바흐체 궁전으로 이동하였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길 건너에 축구장 하나가 있다. 축구 경기가 있는 날이어서 사람들이 많이 몰리고 있다고 들었다. 경찰관들이 주변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돌마바흐체 옆의 축구 경기장
돌마바흐체 옆의 축구 경기장

 

버스에서 내려서 가이드를 따라서 돌마바흐체 궁전 쪽으로 걸어갔다. 저 멀리 있는 돌마바흐체 궁전이 보였다. 멀리서 봐도 그 화려함이 느껴졌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역사

여기서 잠깐! 돌마바흐체 궁전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을 잠깐 알아보자.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그냥 넘어가면 된다.

돌마바흐체 궁전이 있는 곳은 고대부터 배가 정박하는 자연항 형태의 만이었다고 전해진다. 오스만 시대에 오스만 해군이 함정의 닻을 내리고, 전통적인 해군 의식을 거행되던 곳이었다. 17세기 이후에 바다를 매립하여 '돌마바흐체'라고 불리는 왕을 위한 정원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19세기까지 이 정원 내에 목조 저택 및 궁전 건축이 계속되었고, 이것들을 '베식타쉬 해안 궁전'이라고 불렀다.

술탄 압둘메지드 1세 (1839-1861)는 자신의 통치기에 베식타쉬해안 궁전이 철거된 자리에 돌마바흐체 궁전을 지었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건설은 왕실 건축사들인 카라베트 발얀, 오한네스 세르베르얀, 니코오스 발얀 그리고 제임스 윌리엄 스미스가 맡았다. 건축 감독은 1843년부터 1850년까지는 하즈 사이드 아아가, 그다음 1856년까지는 에세이 드 알리 샤힌이 담당했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1856년부터 6명의 술탄과 마지막 칼리프인 압뒬메지드가 살았다. 터키공화국이 생긴 다음에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1927년부터 1938년 사이에 궁전에서 4년 정도 머물렀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서 집무를 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 이 궁전은 1949년까지 이스메트 이뇌뉘 시대에도 대통령의 집무실로 사용되었다. 1984년도에 오스만 시대와 같은 형태로 복원되었다. 그리고 궁전 박물관으로 방문객에게 개방되었다.

지상 2층과 지하 및 꼭대기 층으로 이루어진 돌마바흐체 본관 건물은 기능별로 3개의 구역으로 나눠진다. 술탄이 국정을 보았던 '접견실', 술탄과 그의 가족들의 사생활 공간인 '하렘' 그리고 이 두 공간 사이에 있는 술탄과 국가 고위 인사들이 명절 축하 행사 및 주요 국가 의식을 거행했던 '연회장' 등이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285개의 방과, 44개의 거실, 68개의 화장실, 6개의 목욕탕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일체형 건축물로 터키에서 가장 큰 궁전으로 꼽힌다.

건축 방식과 기능의 관점에서 오스만제국 궁전의 전형적인 형태를 살린 돌마바흐체 궁전은 중앙에 소파와 코너방으로 구성된 터키 가옥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바로크, 로코코, 네오-클래식 등 서양에서 출발한 건축 방식을 적용시켜 오스만 제국의 전통 예술과 문화적 요소들을 서구적 관점으로 재해석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여기서 정리한 돌마바흐체 궁전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나누어준 한국어 팸플릿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 정도 역사적 사실을 알면 충분한 것 같다.

 

 

 

 

다시 돌마바흐체 궁전 후기로

돌마바흐체 궁전에 들어갈 때, 가장 먼저 보이는 시계탑부터 고급스러운 위용을 뽐낸다. 상당히 화려하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시계탑

 

시계탑을 지나면 돌마바흐체 궁전 정문이 보인다. 역시 화려하다.

 

돌마바흐체 궁전 정문
돌마바흐체 궁전 정문

 

궁전 정문에 들어갈 때, 가이드가 전자 가이드 기계를 나누어 주었다. 이 기계는 특정한 구역에 가면 자동으로 안내를 시작한다. 구역번호를 눌러서 안내를 듣기 시작할 수도 있다. 귀에 가까이 대면 소리가 들린다.

정문에 있는 안내소에서 전자 가이드 기계를 빌려준다는 안내가 붙어있었다. 각 언어별로 녹음된 기계가 다 있는 것 같았다. 당연히 우리 가이드는 한국어로 알려주는 기계를 빌려왔다. 한국어 안내를 들으면서 관광을 시작하였다.

 

돌마바흐체 궁전 전자 가이드 기계

 

정문에 들어가서 정원을 조금 지나가면 살타낫 문이 나온다. 매우 화려하고 앞에 있는 사자 석상도 멋있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살타낫 문

 

이 살타낫 문에서 가까이 본관이 있다. 본관의 정문으로 들어갔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본관 정문
돌마바흐체 궁전의 본관 정문

 

정문에 들어갈 때에는 신발에 비닐을 씌워야 한다. 정문에서 나누어준 비닐을 신발에 씌웠다.

 

돌마바흐체 궁전 본관 정문에서 나눠준 비닐

 

비닐을 씌운 신발 모습

 

본관 안은 매우 멋있다. 특히 샹들리에가 정말 가관이다. 연회장에 있는 샹들리에 하나를 거의 5분 넘게 감상하였다. 정말 멋진 샹들리에였다.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패키지 투어로 간만큼 시간이 촉박하여 충분히 감상하기는 어려웠다.

궁전 본관 내에서 화려하고 멋진 것들이 너무 많아서 사진을 찍어 두고 싶었지만, 실내에서는 촬영 금지였다. 아쉬웠지만 문화재보호를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쉬운 마음은 뒤로하고 최대한 열심히 보면서 눈에 담아두었다.

본관 관람을 마치고 정원을 구경하였다.

 

돌마바흐체 궁전 정원 1
돌마바흐체 궁전 정원 1

 

정원을 구경하면서 걸어 다니다 보니 술탄의 사적인 공간인 하렘이 나왔다. 들어가는데 추가 비용이 들기도 하고 시간의 여유도 부족하여 그냥 외관만 보았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하렘 외관

 

하렘 표지판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돌마바흐체 하렘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다시 정원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정원 역시 하나하나 매우 아름다웠다. 하지만 아름다운 정원을 바라보는 마음 한편으로는 씁쓸함이 느껴졌다. 우리나라의 경복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돌마바흐체 궁전 정원 2
돌마바흐체 궁전 정원 2

 

 

돌마바흐체 궁전이 씁쓸했던 이유

돌마바흐체 궁전은 술탄 압둘메지드 1세가 오스만 제국의 위용을 뽐내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왕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 경복궁 재건에 나선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돌마바흐체 궁전 건설에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갔고, 이로 인한 재정 부담은 오스만 제국이 쇠락하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된다. 마치 경복궁 재건에 조선 국력이 크게 소모되고 조선의 쇠락을 앞당긴 것과 같다. 둘 다 자신의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나라의 부흥을 위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반대의 효과를 가져온 것이다.

19세기 중반에 영국, 프랑스 등의 서구 열강이 본격적으로 전세계에 진출하기 시작한다. 그에 따라서 중국, 조선, 일본, 오스만 제국 등의 나라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각자 행동에 나선다. 하지만 이 중에서 일본만이 살아남고 나머지 국가는 그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다. 왜 일본만 살아남았을까? 나는 그 이유가 교육에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1886년에 제국대학령을 반포하고 일본 최초의 대학을 세운다. 그 대학교가 제국대학(현재의 동경대학)이다. 그 당시에도 이 제국대학에 공학부가 있었다. 여기서 배출된 인재들이 일본을 살아남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오스만 제국이나 조선이 각각 돌마바흐체 궁전이나 경복궁을 짓는 대신에 그 예산을 자국 산업 발전이나 교육에 투자하였으면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조금 아쉬웠다.

다시 즐거운 관광 모드로

아쉬운 마음은 뒤로한 채 아름다운 궁전의 모습을 다시 관람하였다. 그래도 술탄 압둘메지드 1세 덕분에 이렇게 아름다운 궁전을 관람할 수 있으니 감사히 생각하기로 하였다.

 

돌마바흐체 궁전 정원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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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마바흐체 궁전 정원 5
돌마바흐체 궁전 정원 5

 

정원을 보고 있다가 가이드가 말한 집합 시간에 맞추어 시계탑으로 갔다. 그리고 시계탑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돌마바흐체 시계탑에서 찍은 기념사진

 

사람들이 다 모이자 가이드가 인원 체크를 하고 다시 버스로 안내하였다. 버스를 타고 다음 관광지인 파노라마 1453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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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녁 9시가 넘어서 앙카라 공항에 도착했다. 시간이 늦었기 때문에 공항에서 가이드를 만나고 바로 버스에 탔다. 그리고 호텔로 이동했다. 다음날 아침에 이스탄불에 가는 길에 베이파자르를 들르게 되었다.

베이파자르는 터키 앙카라주에 속한 마을이다. 앙카라에서 서쪽으로 50Km 정도 떨어져 있다. 당근으로 매우 유명하다. 터키의 당근 생산의 60%를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가이드는 오스만 제국의 북부 전통 가옥 양식을 보여주고 싶어서 이곳에 들른다고 했다. 그리고 당근주스가 싸고 맛있으니까 꼭 사 먹어 보라고 했다.

 

베이파자르의 마을 광장

 

버스를 내려서 좀 걸어가니 마을 광장이 나왔다. 당근으로 유명한 마을답게 광장 중앙에 커다란 당근 모형이 있다.

 

베이파자르의 상점가

 

광장에서부터 상점가가 시작된다. 당근주스 파는 상점도 보였다. 당근주스를 기다리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에 나중에 내려오면서 사 먹기로 하였다. 지방도시였지만 꽤 많은 상점이 있었다. 하지만 이른 시간에 갔기 때문에 많은 상점이 아직 열지 않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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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더 올라가니 전통가옥들이 나왔다. 보수를 잘해서 그런지 새집처럼 보이는 집도 있었고, 정말 역사가 느껴지는 집도 있었다. 집들을 구경하면서 위로 올라갔다.

 

베이파자르의 전통가옥 1
베이파자르의 전통가옥 2

 

터키는 겨울에 장작이나 연탄을 태워서 난방을 하는 곳이 많다고 한다. 베이파자르 마을도 그랬다. 마당을 쌓아놓은 집들이 많았다. 그리고 연기가 나고 있는 굴뚝이 많았다. 마을 거리를 걷다 보면 조금씩 석탄 타는 냄새가 났다.

석탄 타는 냄새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다고 하는데, 나는 그렇게 싫지 않았다. 오히려 은은히 풍겨오는 그 냄새가 베이파자르 마을의 고유한 풍경을 느끼는 데 도움을 주는 것 같았다.

 

베이파자르의 전통가옥 5

 

산 중턱에 이슬람 사원이 있었다. 첨탑 위에 있는 초승달 문양을 보고 이슬람 사원인지 알았다.

한 할아버지가 사원 주변에 있는 쓰레기를 보고 치웠다. 자신이 믿는 종교시설을 깨끗이 하려 하는 것은 어디 가든 똑같은 풍습인 것 같다.

 

베이파자르에 있는 이슬람 사원

 

사원 옆에는 고목이 있었다. 오래된 나무인지 옆에는 설명서도 있었으나 나는 터키어를 읽을 수 없었다.

 

이슬람 사원 옆에 서있는 고목

 

사원 옆면에 구멍이 뚫려있었다. 왜 뚫려있나 싶어서 유심히 관찰했다. 그런데 그때 비둘기 한 마리가 그곳으로 들어갔다. 비둘기집으로 구멍을 뚫어놓은 것 같다.

 

베이파자르의 이슬람 사원 옆면
사원의 비둘기 집으로 비둘기가 들어가는 모습

 

더 보고 싶었지만 패키지 투어의 집합 시간에 맞추어 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내려오면서 당근주스가게에 들렀다. 당근주스가게에서는 깨끗이 씻은 신선한 당근을 그 자리에서 갈아서 당근주스를 만들고 있었다. 신선한 만큼 맛있어보았다.

그리고 당근주스도 매우 쌌다. 1달러 또는 1유로에 4병이었다. 1병에 300mL 정도 되어 보였다. 참고로 터키에서는 달러와 유로를 똑같이 취급한다. 나는 1유로가 없었기 때문에 5유로를 냈다. 아주머니가 4달러를 거슬러 주었다.

당근주스를 받아서 먹어보았는데 정말 맛있었다. 덤으로 씻은 당근도 몇 개 주셨는데 당근도 정말 맛있었다. 당도가 매우 높았다. 사탕과 같이 달달했다.

아주머니가 당근을 넣고 아저씨가 봉을 가지고 당근을 밀어 넣으면서 주스를 만들고 있었다. 한번 나도 만들고 싶어서 한번 해보겠다고 했다. 아저씨가 흔쾌히 해보라고 하셨고 10초 정도 해본 다음에 다시 돌려드렸다. 재미있었다.

 

베이파자르 당근주스 가게

 

당근주스가게에서 준 당근

 

광장에서 약속시간에 모인 후에 가이드를 따라서 다시 버스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스탄불을 향하여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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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안 보일 정도로 길었던 군생활 동안 항상 꿈꿔온 것이 외국여행이었다. 부대 안에 있으면 많은 자유를 박탈당한다. 그런 군생활의 정반대 편에 있다고 생각한 것이 외국여행이었다. 외국여행을 가면 보다 넓은 땅을 자유롭게 누비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군생활 동안 외국여행을 생각했다. 그리고 그 꿈은 전역이 가까워질수록 더 강해졌다. 마침내 전역이 눈에 보이는 시점이 왔고, 나는 전역 후에 며칠 이내로 외국여행을 나가기로 했다.

원래는 자유여행으로 가려고 했지만 패키지여행으로 가게 되었다. 비행깃값이 너무 비쌌기 때문이다. 그리고 터키를 가기로 했다. 가보고 싶은 나라는 많았지만, 터키가 여행비가 싸면서도 볼 것이 많아 보였다. 그래서 터키로 결정하고 패키지여행을 예약했다.

예약을 완료하고서 며칠 후에 나는 전역을 했다. 전역을 하면 정말 기분 좋을 줄 알았는데 별 느낌이 없었다. 그냥 꿈꾸고 일어났는데 일 년 반이 지나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꿈속에서 나는 얼어 죽을뻔하고, 사람이 못 갈 것 같은 산을 오르며, 한 달에 밤을 13번도 새우면서 근무서고, 그 와중에 공부는 했던 것 같은데 꿈 깨니까 시간만 지나있고 아무것도 없는 느낌이라 할까. 아무튼 다음날부터 집안일을 도와드리면서 여행 준비를 하였다. 그리고 또 며칠 후에 터키로 가기 위해 인천공항에 갔다.

 

그 오랜 군 생활 동안 외국여행 가는 것을 정말 학수고대해왔기 때문에 공항에 오면 매우 기쁘고 싱숭생숭할 줄 알았다. 그렇지만 아무 느낌도 들지 않았다. 그냥 오랜만에 해외 나가는 것 같았고, 그동안에 시간은 사라진 느낌이었다. 그저 내 인생의 1년 반이 사라진 느낌이었다. 그래서 오랫동안 바라왔던 해외여행에 대한 동경심도 그 시간들과 같이 사라진 것 같았다. 사라진 시간들 동안 꾸어왔던 꿈이었기에 꿈도 그 꿈에 대한 열망도 그 시간들과 같이 사라진 것이다.

공항에서 간단히 점심을 먹고, 미리 신청해놓은 환전을 하고, 항공사 체크인을 하고, 예약해 놓은 유심을 받았다. 그리고 보안검색대에 갔다. 보안검색대가 매우 한산했다. 아무리 코로나가 거의 끝나고 해외여행 가는 사람이 많다고 해도 코로나 이전보다는 훨씬 적었다. 보안검색대를 통과하여 출국심사를 받고 면세점을 구경하다가 비행기에 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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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행기가 떴다. 곧 있으니 아래에도 구름이 있고 위에도 구름이 있었다. 그리고 아래의 구름 사의로 섬들과 배들이 자그마하게 보였다. 뭔가 세상이 나눠진 느낌이었다. 하나의 세계가 끝나고 다른 세계로 입장한 것 같았다. 다시 예전 세계로 돌아가면 많은 것들이 달라져 있을 것 같았다.

 

아래위로 구름이 있는 비행기

 

비행기는 해보다 느렸다. 비행기는 해보다 먼저 인천공항에서 출발했지만, 해는 비행기보다 먼저 앙카라 공항에 도착했었다. 그리고 먼저 떠났다. 비행기가 앙카라 공항에 도착했을 때에는 이미 해가 떠나 어두워진 뒤였다. 앙카라 공항에 도착할 때쯤에 본 앙카라의 야경은 정말 멋있었다.

 

비행기에서 본 석양

 

비행기에서 내리기 전까지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막상 내리니 기분이 정말 좋았다. 무언가 제대로 해방된 느낌이었다. 수면 밑으로 가라앉던 꿈들이 다시 수면 위로 올라와서 춤추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내 터키 여행은 시작되었다.

 

앙카라 공항 입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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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터키 여행의 일정정리-

앙카라 → 베이파자르 → 이스탄불 → 부르사 → 마니사 → 에페소(에페수스) → 쉬린제(시린제) → 파묵칼레 → 올림푸스산 → 안탈리아 → 카파도키아(네브셰히르) → 앙카라

터키에서 방문했던 명소들에 대한 감상을 하나씩 기록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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