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2. 15. 15:00ㆍ터키(튀르키예) 여행
당근이 맛있었던 베이파자르 마을을 떠나 이스탄불로 향했다. 점심으로 케밥을 먹고 돌마바흐체 궁전으로 이동하였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길 건너에 축구장 하나가 있다. 축구 경기가 있는 날이어서 사람들이 많이 몰리고 있다고 들었다. 경찰관들이 주변 교통정리를 하고 있었다.
버스에서 내려서 가이드를 따라서 돌마바흐체 궁전 쪽으로 걸어갔다. 저 멀리 있는 돌마바흐체 궁전이 보였다. 멀리서 봐도 그 화려함이 느껴졌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역사
여기서 잠깐! 돌마바흐체 궁전에 대한 역사적인 사실을 잠깐 알아보자. 역사에 관심이 없는 사람은 그냥 넘어가면 된다.
돌마바흐체 궁전이 있는 곳은 고대부터 배가 정박하는 자연항 형태의 만이었다고 전해진다. 오스만 시대에 오스만 해군이 함정의 닻을 내리고, 전통적인 해군 의식을 거행되던 곳이었다. 17세기 이후에 바다를 매립하여 '돌마바흐체'라고 불리는 왕을 위한 정원이 만들어졌다. 그리고 19세기까지 이 정원 내에 목조 저택 및 궁전 건축이 계속되었고, 이것들을 '베식타쉬 해안 궁전'이라고 불렀다.
술탄 압둘메지드 1세 (1839-1861)는 자신의 통치기에 베식타쉬해안 궁전이 철거된 자리에 돌마바흐체 궁전을 지었다. 돌마바흐체 궁전의 건설은 왕실 건축사들인 카라베트 발얀, 오한네스 세르베르얀, 니코오스 발얀 그리고 제임스 윌리엄 스미스가 맡았다. 건축 감독은 1843년부터 1850년까지는 하즈 사이드 아아가, 그다음 1856년까지는 에세이 드 알리 샤힌이 담당했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1856년부터 6명의 술탄과 마지막 칼리프인 압뒬메지드가 살았다. 터키공화국이 생긴 다음에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1927년부터 1938년 사이에 궁전에서 4년 정도 머물렀다. 그리고 그는 이곳에서 집무를 보다가 세상을 떠났다. 그 이후 이 궁전은 1949년까지 이스메트 이뇌뉘 시대에도 대통령의 집무실로 사용되었다. 1984년도에 오스만 시대와 같은 형태로 복원되었다. 그리고 궁전 박물관으로 방문객에게 개방되었다.
지상 2층과 지하 및 꼭대기 층으로 이루어진 돌마바흐체 본관 건물은 기능별로 3개의 구역으로 나눠진다. 술탄이 국정을 보았던 '접견실', 술탄과 그의 가족들의 사생활 공간인 '하렘' 그리고 이 두 공간 사이에 있는 술탄과 국가 고위 인사들이 명절 축하 행사 및 주요 국가 의식을 거행했던 '연회장' 등이다. 돌마바흐체 궁전은 285개의 방과, 44개의 거실, 68개의 화장실, 6개의 목욕탕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일체형 건축물로 터키에서 가장 큰 궁전으로 꼽힌다.
건축 방식과 기능의 관점에서 오스만제국 궁전의 전형적인 형태를 살린 돌마바흐체 궁전은 중앙에 소파와 코너방으로 구성된 터키 가옥의 특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바로크, 로코코, 네오-클래식 등 서양에서 출발한 건축 방식을 적용시켜 오스만 제국의 전통 예술과 문화적 요소들을 서구적 관점으로 재해석했다는 평가도 받고 있다.
여기서 정리한 돌마바흐체 궁전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돌마바흐체 궁전에서 나누어준 한국어 팸플릿을 바탕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 정도 역사적 사실을 알면 충분한 것 같다.
다시 돌마바흐체 궁전 후기로
돌마바흐체 궁전에 들어갈 때, 가장 먼저 보이는 시계탑부터 고급스러운 위용을 뽐낸다. 상당히 화려하다.
시계탑을 지나면 돌마바흐체 궁전 정문이 보인다. 역시 화려하다.
궁전 정문에 들어갈 때, 가이드가 전자 가이드 기계를 나누어 주었다. 이 기계는 특정한 구역에 가면 자동으로 안내를 시작한다. 구역번호를 눌러서 안내를 듣기 시작할 수도 있다. 귀에 가까이 대면 소리가 들린다.
정문에 있는 안내소에서 전자 가이드 기계를 빌려준다는 안내가 붙어있었다. 각 언어별로 녹음된 기계가 다 있는 것 같았다. 당연히 우리 가이드는 한국어로 알려주는 기계를 빌려왔다. 한국어 안내를 들으면서 관광을 시작하였다.
정문에 들어가서 정원을 조금 지나가면 살타낫 문이 나온다. 매우 화려하고 앞에 있는 사자 석상도 멋있다.
이 살타낫 문에서 가까이 본관이 있다. 본관의 정문으로 들어갔다.
정문에 들어갈 때에는 신발에 비닐을 씌워야 한다. 정문에서 나누어준 비닐을 신발에 씌웠다.
본관 안은 매우 멋있다. 특히 샹들리에가 정말 가관이다. 연회장에 있는 샹들리에 하나를 거의 5분 넘게 감상하였다. 정말 멋진 샹들리에였다. 더 구경하고 싶었지만 패키지 투어로 간만큼 시간이 촉박하여 충분히 감상하기는 어려웠다.
궁전 본관 내에서 화려하고 멋진 것들이 너무 많아서 사진을 찍어 두고 싶었지만, 실내에서는 촬영 금지였다. 아쉬웠지만 문화재보호를 위해서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아쉬운 마음은 뒤로하고 최대한 열심히 보면서 눈에 담아두었다.
본관 관람을 마치고 정원을 구경하였다.
정원을 구경하면서 걸어 다니다 보니 술탄의 사적인 공간인 하렘이 나왔다. 들어가는데 추가 비용이 들기도 하고 시간의 여유도 부족하여 그냥 외관만 보았다.
하렘 표지판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다시 정원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정원 역시 하나하나 매우 아름다웠다. 하지만 아름다운 정원을 바라보는 마음 한편으로는 씁쓸함이 느껴졌다. 우리나라의 경복궁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돌마바흐체 궁전이 씁쓸했던 이유
돌마바흐체 궁전은 술탄 압둘메지드 1세가 오스만 제국의 위용을 뽐내기 위해서 만든 것이다. 흥선대원군이 왕실의 권위를 다시 세우기 위해서 경복궁 재건에 나선 것과 비슷하다. 하지만 돌마바흐체 궁전 건설에 어마어마한 돈이 들어갔고, 이로 인한 재정 부담은 오스만 제국이 쇠락하는 원인 중의 하나가 된다. 마치 경복궁 재건에 조선 국력이 크게 소모되고 조선의 쇠락을 앞당긴 것과 같다. 둘 다 자신의 왕실의 권위를 세우고 나라의 부흥을 위한 것이었지만 결과적으로는 그 반대의 효과를 가져온 것이다.
19세기 중반에 영국, 프랑스 등의 서구 열강이 본격적으로 전세계에 진출하기 시작한다. 그에 따라서 중국, 조선, 일본, 오스만 제국 등의 나라는 위기감을 느꼈다. 그리고 그 위기를 극복하기 위하여 각자 행동에 나선다. 하지만 이 중에서 일본만이 살아남고 나머지 국가는 그 위기를 극복하지 못했다. 왜 일본만 살아남았을까? 나는 그 이유가 교육에 있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1886년에 제국대학령을 반포하고 일본 최초의 대학을 세운다. 그 대학교가 제국대학(현재의 동경대학)이다. 그 당시에도 이 제국대학에 공학부가 있었다. 여기서 배출된 인재들이 일본을 살아남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만약 오스만 제국이나 조선이 각각 돌마바흐체 궁전이나 경복궁을 짓는 대신에 그 예산을 자국 산업 발전이나 교육에 투자하였으면 역사가 바뀌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조금 아쉬웠다.
다시 즐거운 관광 모드로
아쉬운 마음은 뒤로한 채 아름다운 궁전의 모습을 다시 관람하였다. 그래도 술탄 압둘메지드 1세 덕분에 이렇게 아름다운 궁전을 관람할 수 있으니 감사히 생각하기로 하였다.
정원을 보고 있다가 가이드가 말한 집합 시간에 맞추어 시계탑으로 갔다. 그리고 시계탑에서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람들이 다 모이자 가이드가 인원 체크를 하고 다시 버스로 안내하였다. 버스를 타고 다음 관광지인 파노라마 1453으로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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